느릅나무와 집



건축가의 일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물건을 사고팔 때와는 다른 특징이겠지요.

땅이 있어야 하고, 건축주가 있어야 하고, 건축가들이 있어야 무엇인가 지어질 수 있습니다. 공장에서 생산된 집도 있고, 바퀴가 달린 집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땅과 사람,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제자리에 백 년은 서있을 자기만의 집을 찾는 분들이 저의 고객입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 새로운 집이 만들어집니다. 단 한 번도 똑같은 집을 만들어 본적은 없습니다. 오늘도 저는 새로운 땅을 향해 북한강을 따라 가평군 청평면 상천리에 다녀왔습니다.


땅은 두 발로 딛고,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바람이 부는 곳, 해가 뜨고 지는 곳을 확인하지 않고는 상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경험이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산도 같은 산이 없고, 바다도 같은 바다가 없듯이 땅도 정말 그 모습이 모두 다릅니다. 그 덕분일까요? 건축을 의뢰하는 분들 모두 색이 다릅니다. 성격과 외모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분위기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스위스의 건축가 피터 줌 토르 선생의 ‘분위기는 나의 힘’이라는 글처럼 땅도 사람도 새로 지어지는 집들도 ‘분위기’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시간이 더해지면 그곳만의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생활을 하면서 사람의 냄새가 짙게 자리하고, 딛고 선 땅의 모습을 부드럽게 만들어 냅니다. 물론 사람의 손길과 숨결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나무기둥, 나무마루에 손 때가 묻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집이 지어지기 전에는 없던 길도 생겨나고, 사람이 살면서 고양이와 반려견도 동거를 하면 나무와 바람과 해가 드나들던 장소에 숨결과 손결이 더해지면, 그곳만의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우리들이 고택이나 고궁, 정원 같은 오래된 장소에 가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사람의 발걸음, 손결에 무뎌진 모양을 느낄 수 있어서 아닐까요?


상천리에 도착해서 두 시간 동안 외뢰인과 차를 마시고 장작 난로 앞에 앉아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갈한 찻잔, 손으로 만든 나무 접시, 구리로 두들겨 만든 인도에서나 찾아봄직한 긴 부리가 어울리는 물주전자, 지름 20센티의 구리 냄비, 짜 맞춘 의자와 참나무 가구들은 의뢰인의 성격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관찰을 하려던 것은 아니고 손 때 뭍은 살림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더군요  


조기 퇴직을 하고 오랜동안 찾아다니던 땅을 얻게 된 사연, 집 앞 저만치 서 있는 밤나무를 아끼는 마음, 나이가 지긋해서 더는 오디가 열리지 않는 뒷곁 산뽕나무, 마당에 손수 놓은 디딤돌, 1년간 부지런히 꾸민 구들 놓인 농막과 여름 한 철을 날 수 있는 온실에 대한 이야기까지 풍경을 곁들인 가을 찻집 같은 곳에서 집에 대한 추억과 기억, 희망을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두 세주 후면 기본적인 구성은 나올 것 같습니다. 동행한 이 소장도 새로 지어질 장소가 좋은지 얼굴에 웃음을 보입니다. 조금은 보수적인 이 소장이 웃음을 보인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남쪽에 수형이 좋은 느릅나무가 서 있습니다. 의뢰인은 이 집의 풍경을 좌우할 것 같은 느릅나무를 몇 번이나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습니다. 이곳의 격에 맞는 처마가 깊게 걸린 풍경을 품을 단정하고 품격 있는 나무집을 만들게 될 것 같습니다